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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재미있게 보고 있는 금, 토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이다. 정조 이산의 삶과 성덕임과의 사랑 이야기가 전개되고 있다.
이산의 역은 이준호가 성덕임 역은 이세영이 열연하고 있다. 드라마를 시작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이제 극의 전개는 초반을 달려간다.
금, 토일 밤 9시 50분에 mbc에서 방송 중.
정조 이산의 삶은 정말 드라마보다 더한 삶이었다. 사극에서 드라마 소재로 탑 순위에 오를 정도로 정조의 인기도 높다.
드라마를 보면서 역사속 사실과 얼마나 다르고 같은지 궁금한 분들도 많을 것 같다. 이산과 성덕임의 스토리를 살펴보면서 드라마와 비교해서 보면 재밌을 것 같다. 그럼 역사 속 정조 이산과 성덕임의 러브스토리 살펴보도록 하겠다.
옷소매 붉은 끝동 정조 성덕임 역사 스토리
옷소매 붉은 꽃등에서 성덕임은 실존 인물이다. 정조에게 그녀는 어릴때부터 좋아하던 첫사랑 여인이었다.
덕임의 아버지는 집안이 가난했고 늦은 나이에 무관으로 입사하여 영조 37년에 유원 첨사가 되었지만 곧 그만두게 된다. 이후 따로 벼슬을 지냈던 기록은 없으며 영조 45년에 사망하게 된다.
후에 성덕임은 중인 출신으로 10세 전후에 궁궐에 입궁하여 궁인이 된다. 입궁하게 된 이유는 덕임의 아버지가 나라에 바칠 곡식과 돈을 써버리는 거의 죽음 직전까지 망하게 된 사건 때문이었다. 덕임이 입궁하기 전 친 어머니는 사망하고 가세가 많이 기울어졌다.
혜경궁 홍씨 가문과 인연이 있어서 영조 38년에 혜경궁 홍씨가 자신의 두 딸 청연공주, 청선공주가 있었지만 성덕임을 총애하며 어릴 때부터 같이 키웠다.
정조 (이산)와는 어릴때 덕임과 만남을 갖게 되고 이때부터 어린 성덕임을 좋아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나이가 들고 정조가 성덕임에게 2번이나 승은 후궁을 제안하지만 성덕임은 거절하게 된다.
첫 번째 제안은 성덕임이 14세 정도 되었을 때인데 정조의 마음을 받지 않았다. 아마 웃전의 궁녀를 후궁으로 삼으면 아버지 사도세자처럼 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이후 사건을 키우지 않았던 것 같다고 전해진다.
두번째 제안할 때도 거절한 이유는 정조의 부인 효의왕후의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승은 후궁을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이유들이 그녀의 진심이었는지 아닌지는 그녀만 알 것이다.
이러한 후궁 제안을 2번이나 거절한것은 조선시대 궁궐에서 참 대단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궁녀가 왕의 승은을 거절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거나 다름없던 시기였다.
정조는 그녀가 허락할때까지 오랜 시간 기다린 것만 봐도 얼마나 아꼈는지 보여주는 사례였다.
그래도 3번째 승은 후궁의 제안은 결국 성덕임의 승낙을 받게 되었다. 그 과정도 정조가 꾀를 낸 건지 아님 진심으로 화가 나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성덕임의 궁궐 동무들을 불러서 왜 성덕임이 승은 후궁을 거절한 건지 이유를 묻고 호통을 치고 괴롭히기 시작했는데, 그 사실을 알고 성덕임은 결국 승낙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렇게 장장 15년의 기다림후에 성덕임을 후궁으로 들이게 된다. 정조가 유일하게 자발적으로 맞이한 승은후궁이었고 정조의 후궁 중에서 유일한 궁인 출신이었다.
1782년 (정조 6년)에 성덕임은 아들을 출산하게 되고 소용으로 봉해진다. 다음해에 아들은 문효세자로 책봉되고 성덕임은 정3품 벼슬의 내명부 의빈이 되었다. 1784년(정조 8년)에는 딸 옹주를 낳았다.
정조는 의빈성씨(성덕임) 이외의 여자들은 마음에 없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정말 좋아했다고 하는데, 6년 동안 의빈성씨는 5번의 임신을 했다는 것만 봐도 이런 말이 나오는 게 과언이 아니었다.
정조는 덕임과 낳은 아들을 정말 예뻐했는데 동궁전인 중희당도 새로 지어주고 아들이 총명하다고 자랑도 하고 지극정성인 사랑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옹주가 돌도 되기전에 사망하게 되고, 그 뒤로 2년 후에 아들 문효세자가(5세) 홍역으로 죽게 된다.
이때 의빈성씨는 임신 중이었는데 상심이 컸는지 아들이 죽은 2달만(1786년)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녀의 나이 34살(정조 10년)이었다. 지금으로 보면 임신중독증이 아니었을까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정조는 의빈성씨의 죽음 이후에 상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의빈 사당에서 밤을 새우면서 그녀에 대한 마음을 절절하게 전하는 기록을 적어놓기도 했다. 정조는 의빈이 죽은 뒤 손수 묘표와 묘지명의 문장을 지었다. 이것은 왕실에서도 아주 드문 일이었다. 정조의 부인들 가운데 어제비를 받은 사람은 의빈 성씨뿐이다.
정조에게는 정비 효의왕후와 후궁이 4명 있었다. 의빈성씨외에 홍국영의 누이 원빈홍씨가 입궁하고 1년 만에 사망했고, 화빈윤씨는 질투와 투기가 심해서 따로 위리안치되고 목숨만 부지하게 되었다. 수빈박씨은 문효세자의 죽음으로 후사를 위해 후궁 간택을 통해서 18세로 입궁했고 (이때 정조의 나이는 36살) 훗날 순조를 낳은 어머니가 되는데 정조와는 14년 동안 1남 1녀를 낳는다.
의빈성씨 성덕임은 훗날 자신의 미래를 미리 예견하고 승은후궁을 2번이나 거절했던 것이었을까?
공식적으로는 효의왕후와 정조의 사이가 원만하지 않고 슬하에 자손이 없어서 배려하기 위해 거절했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이 진심이 아니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당시 선대의 후궁들(귀인 조씨, 희빈 장씨, 정빈 이씨, 영빈 이씨, 숙빈 이씨, 경빈 박씨...)이 모두 비참한 생을 마감했던 것을 알게 되면서 두려움이 생겼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조가 의빈 성씨를 향한 사랑은 기록을 통해서 알려졌지만 정작 의빈성씨가 정조를 향한 마음은 기록되지 않아서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정조를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은을 거절한 것은 아닌지 후세들은 의심해보기도 한다.
정조도 종기와 울화병 등 몸이 좋지 않았다. 오죽했을까.. 사도세자의 아들로써 살아온 삶 그 자체가 기적인 인생이었다. 결국 그의 꿈은 다음 세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49살에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아들 순조(10살)가 왕위에 오르는데 정순왕후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면서 세도정치의 막이 오르게 되었다.
정조는 정치, 언론, 경제 개혁을 단행했던 군주였다. 오래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텐데.. 왕가의 후손으로 태어났어도 정말 복이 없던 분이었다.
부모복, 자식복, 처복도 없었는데 대신 할아버지(영조)처럼 오래살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정조의 죽음도 타살이라는 의혹이 넘치는데 현대에서는 그저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만약 역사에서 가정이라는건 없지만 의빈이 독살로 죽은 게 아니라는 가정하에 처음 승은 후궁 제안을 받아서 자식을 낳고 살았다면 조선의 역사는 좀 더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개혁군주였던 정조대왕은 애틋하게 한 여자를 사랑한 멋진 사랑꾼이었다. 두 사람의 역사를 알고 보면 옷소매 붉은 꽃등도 좀 더 재미있게 볼 수 있을 것 같다.
정조는 성덕임을 사랑했다.
그녀도 정조를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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